2010 11/16ㅣ위클리경향 900호

ㆍ파생상품R&D센터 설립 등 양측 갈등 악화일로

 '한국거래소가 정말로 부산에 정착할 의지가 있는지 믿을 수 없다. 더 바라는 게 아니다. 과거에 한 약속만 지켜달라는데 그조차도 안한다.”
 11월 3일 오후 부산 롯데호텔. 박인주 청와대 사회통합수석, 이성권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과 마주한 부산시민단체 6명의 대표들이 한국거래소에 대한 성토를 쏟아냈다. 이 자리는 지역 시민사회로부터 지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듣고 국정에 반영하자는 취지에서 청와대 사회통합수석실이 직접 마련했다.
 박인호 부산경제살리기시민연대 상임의장, 김정각 부산종교인평화회의 상임대표, 조성렬 동아대 교수 등 부산지역 주요 시민단체 대표들이 제기한 첫번째 지역 현안은 단연 ‘한국거래소’였다. 대규모 정부 예산지원이 달려 있는 부산영상센터 건립, 북항 재개발 등은 다음 얘기였다.
  이들의 요구는 명확했다. 파생상품 거래를 돕는 접속장치인 라우터를 부산에 설치해줄 것, 파생상품 R&D센터를 약속대로 설립해줄 것, 그리고 한국거래소 내 이사회에 지역 출신을 포함시켜 달라는 요구 등이었다. 박 수석은 “시민단체 여러분들의 의견을 잘 알겠다”며 “(청와대로) 돌아가는 대로 바로 챙기겠다”고 말했다.
 
 
 부산에 본사를 둔 한국거래소와 부산의 관계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지난 2005년 증권거래소와 선물거래소를 합쳐 부산에 통합본사를 설립한 이후 최악이라는 얘기까지 흘러나온다. 지난 5년간 간간이 이견이 생겨 충돌한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여론이 격앙된 적은 없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 기간 시민사회단체가 발표한 성명서만 8건에 달했고, 항의집회도 한 차례 열렸다. 연초부터 파생상품 R&D센터 설립을 놓고 긴장관계가 조성되더니 국감을 전후해서는 라우터 설치 문제로 불이 붙었다. 부산의 여론 주도층들은 “한국거래소의 마음이 부산에 없다”는 입장이고, 한국거래소는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고 추진할 수 없는 문제”라며 반박하고 있다.

 부산 시민사회단체는 한국거래소의 공공기관 지정 반대, 복수 거래소 허가 반대 등 한국거래소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힘을 실어주던 우군이었다. 청와대까지 부랴부랴 나서 여론 진화에 나선 것은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10월 14일 열린 한국거래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이진복 의원은 거래소가 오래 전에 자체 작성한 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선물 이관 및 통합본사 유치 관련 청사진’이라고 적힌 7페이지짜리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4월 70명 수준의 선물 연구원 및 연수원을 설립한다고 명시돼 있다. 2005년 1월에는 통합거래소 부산 본사 건물을 착공해 2007년 1월에는 본사 건물을 준공하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또 부산이 증권선물 중심도시로 정착하면 증권선물회사와 유관기관의 인력도 추가로 이전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10년 오늘 기준으로 볼 때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의원은 “참담하다”고 운을 뗀 뒤 “한국거래소가 설립된 지 5년이 지났지만 당초 약속했던 것 중에 지켜진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거래소와 부산의 갈등 진원지는 파생상품R&D센터였다. 거래소는 선물연구원과 연수원 건립계획을 폐지하면서 파생상품 R&D센터로 대체하자는 안을 내놓았다. 문제는 인원을 당초 계획된 70명에서 20명선으로 축소하고 센터를 자본시장연구원의 분원으로 하기로 하면서다. 거래소 측은 파생상품R&D센터를 독자적으로 만들 경우 기존 자본시장연구원과 역할이 중복되는 데다, 유사기관이 서울에 있어서는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도 어렵다는 이유를 댔다. 내부적으로는 자본시장연구원의 연간 운영비 30%를 지원하고 있는 상태에서 독립법인을 또 추가로 지원할 수 없다는 판단도 있었다.

 부산 시민단체들은 즉각 반발했다. 선물연구원 설립을 계속 지연하다 6년 만에 만든다고 내놓은 안이 고작 20명 규모의 분원이냐는 것이다. 금융중심도시이지만 제대로 된 금융연구원 하나 없는 부산으로서는 독자적인 금융연구원을 갖고 싶은 욕심도 컸다. 조성렬 동아대 교수는 “거래소가 약속을 전면적으로 깰 수는 없으니까 생색내기용으로 R&D센터를 만들겠다는 게 아닌지 의심된다”며 “통화, 금리, 원자재, 선박금융 등을 함께 연구할 수 있는 독자적인 연구소의 출범을 원하지만 20명 규모의 분원으로 그런 역량을 갖출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상태에서 라우터 문제가 터졌다. 파생상품 거래주문 접속장치인 라우터가 서울에만 있어 부산에서 주문을 낼 경우 체결 속도가 늦어진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계산적으로는 부산에서 주문을 내면 서울보다 0.0007초가 더 걸린다. 파생거래 전산시스템은 부산 본사에 있지만 접속하려면 서울에 있는 라우터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한 선물회사 관계자는 “속도가 생명인 파생상품 거래에서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선물회사들이 시스템의 도움조차도 받을 수 없는 부산에 굳이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 부산에 본사나 지점을 둔 선물회사는 2003년까지 8개였지만 지금은 BS투자증권(옛 부은선물) 하나만 남은 상태다. BS투자증권은 부산에 본사를 둔 부산은행 자회사다.

 거래소는 반박한다. 2006년 최고정보책임자(CIO)협의회 등을 거쳐 라우터는 회원사가 몰려 있는 서울에 두기로 했을 때 부산에서 별다른 문제 제기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 속도로 인해 선물회사가 부산을 떠난다는 것도 다소 과장됐다는 입장이다. 선물거래는 특성상 개미투자자보다 기관투자가가 많아 0.0007초로 인해 영향을 받을 거래는 많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부산과 거래소의 갈등은 김봉수 이사장에 대한 불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게 지역 금융권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이명박 정부가 부산 출신인 이정환 이사장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끌어내린 뒤 선임된 김봉수 이사장에 대해 지역 여론은 처음부터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설화가 터졌다. 김 이사장이 지난 1월 서울 여의도에서 가진 취임 간담회에서 “비행기를 일곱번 타고 기차를 세번 타면서 최근 2주 동안 다섯번이나 부산에 갔다 왔다”며 “계산해보니 1년에 비행기 타는 횟수가 140여번이 되던데 이렇게 하늘에 돈을 뿌려도 되나”라고 말했다. 

 당시는 이명박 정부가 효율성을 내세워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이던 때였다. 때마침 ‘방만경영의 원인은 본사가 부산에 있는 것도 큰 만큼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라’는 내용의 성명서도 거래소 본관에 나붙었다. 지역 언론은 들끓었다. 부산 조직을 축소하고 서울로 옮겨가는 방안이 나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퍼졌다. 부산지역 한 관계자는 “김 이사장이 취임사에서 ‘부산’에 대해 단 한번도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당시 정부 분위기와 맞물려 지역사회의 우려가 많았다”며 “각종 회견문의 절반 이상을 부산의 비전과 거래소의 기여방안에 대해 언급하던 이영탁, 이정환 전 이사장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고 말했다. 
 이런 불신은 김 이사장의 첫 작품인 조직개편부터 홍역을 치른 원인이 됐다. 부산에 있는 경영지원본부와 파생시장본부에서만 3개부서 8개팀을 없애려 한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 부산 여론은 또 들끓었다.

 현 거래소 이사회에 부산 출신이 없는 것도 김 이사장에게 탈부산 의도가 있는 것으로 시민단체는 해석하고 있다. 시민단체의 주장에 따르면 2005∼2007년 이사회 15명 중 부산과 연고가 있는 인사는 7명에 달했다. 우영호 전 선물시장본부장, 옥치장 유가증권시장 본부장, 김지완 전 현대증권사장, 김지수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조성렬 동아대 교수 등 부산과 연고가 있는 인사들이 이사회의 주류를 이뤘다. 한 관계자는 “김봉수 이사장이 들어선 이후 시민단체와는 딱 한번 만났다”며 “거래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이 없고, 지역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사전에 전달하는 사람도 없다보니 거래소는 홀로 ‘섬’으로 고립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거래소 측은 “냉정하게 보면 그때도 부산 인사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명에 불과했다”며 “그 한명이 빠졌을 뿐이지 15명 중 7명이 부산 연고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부산과 거래소의 소원한 관계는 문현금융단지 입주를 놓고 현실이 됐다. 한국거래소는 10월 22일에야 문현금융단지 입주를 최종 결정했다. 8개 입주 예정 기관 중 가장 늦게 결정을 내린 것이다. 63층 높이의 부산국제금융센터 입주를 놓고 벌인 신경전이 발단이 됐다. 문현금융단지는 2012년 이전 공공기관을 위해 마련된 만큼 한국거래소는 이전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부산시는 이전 공공기관에 준하는 혜택을 주겠다며 한국거래소와 부산은행 본점, 한국은행 부산지점 등이 금융단지에 입주하도록 요청했다. 거래소는 지역 기여도, 상징성, 보안성, 상주인원 등을 들어 입주 층수에 우선권을 줄 것을 내심 바랐지만, 부산시는 “다른 공공기관들이 반대한다”며 난색을 표했다. 가뜩이나 이전 공공기관 직원들의 아파트가 들어서는 대연혁신지구 특별분양에서도 거래소 직원들은 빠진 상태였다. 거래소에서는 “가장 먼저 부산에 와 정착했는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느냐”며 불만이 터져나왔다.

 물론 부산시도 할 말은 있다. 거래소가 특혜를 요구할 정도로 뚜렷이 기여한 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지역 행사에 거래소의 후원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며 “부산은행이나 한진중공업 등과 비교해보면 거래소를 부산 기업으로 생각하는 부산시민이 얼마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거래소는 부산 이전 이후 지역사회를 위해 할 만큼 했다는 입장이다. 2007년 이후 거래소의 부산지역 사회공헌활동액은 21억원으로 전체 공헌액(40억원)의 절반을 썼다. 국감에서는 오히려 “지나치게 부산만 퍼준다”(민주당 조영택 의원)는 질책도 나왔다. 거래소 밑바닥에는 “부산 사람들이 배려 없이 너무 요구만 한다”는 정서가 깔려 있다. 문제는 부산과 거래소의 갈등은 남의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2012년부터 170여개의 공공기관이 일제히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면 공공기관과 지자체 간 갈등이 본격화될 수 있다. 지역의 입장에서는 이전 공공기관이 더 많은 역할을 해주길 바라는 반면, 이전 공공기관은 지역이 더 많은 배려를 해주기를 바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가 지역 균형발전에 대한 확고한 원칙을 세우고 방향을 잡아주지 않으면 갈등은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 공공기관 관계자는 “부산과 거래소의 갈등은 다른 지방이전 공공기관의 미래”라면서 “한발씩 물러나 지방과 이전 공공기관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11월부터 식품의약품안전청 등 6개 보건의료 국책기관이 충북 오송생명과학단지로 이전하기 시작한다. 주요 공공기관의 이전도 두 해 앞으로 다가왔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 위클리경향 & 경향닷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Posted by 서툰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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