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경향 923호

[경제]한·중·일 신용평가사, 글로벌 3사에 도전장

ㆍ북미·유럽국가에 관대한 등급 극복 시장에 다양한 의견 제공

신용등급을 매기는 신용평가사는 돈이 필요한 기관에는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다. 그들이 매긴 신용등급은 투자자들로부터 투자금을 조달하는 절대적인 근거가 된다. 속된 말로 신평사에 제대로 찍히면 어느 기관이든 생존하기가 어렵다.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도 10여년 전 외환위기 때 호된 경험을 했다. 문제는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 무디스, 피치 등 글로벌 신용평가기관이 영·미계 일색이라는 것. 이들은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아시아는 물론 유럽으로부터도 강한 불신을 받았다.

2009년 개최된 한·중·일 신용평가 포럼에서 한신정평가, 다공, R&I의 대표이사가 손을 맞잡고 있다. | 한신정평가 제공


동북아 3개국과 영·미계 3개 신용평가사 간 신용평가 전쟁이 시작됐다. 4월 13일 토종 신용평가사인 한신정평가는 6개 국가의 신용등급을 발표했다. 대상은 말레이시아, 태국, 브라질, 인도네시아, 필리핀, 한국 등이다. 아시아에서 국가 신용등급을 발표한 것은 일본의 R&I, 일본신용평가연구소(JCR), 중국의 다공(大公)에 이어 네 번째다.

국가 신용등급에 금융시장 ‘흔들’
한신정평가 이용희 대표이사는 “국가 신용평가는 3개 글로벌 신용평가사의 전유물로 이들의 의견이 국제금융시장을 좌지우지해왔다”며 “이번 발표를 계기로 세계 신용평가시장에 다양한 의견을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중·일 3국이 독자적인 신용평가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논의가 본격 나온 것은 2009년이다. 한신정평가, R&I, 다공 등이 공동으로 개최한 한·중·일 신용평가 포럼에서 3개 기관은 하나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S&P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 중심의 신용평가 체계가 아시아지역의 자본시장과 특수성을 적절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이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신용평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협력해 나가자는 것이었다.

중국 다공의 진용슈 부회장은 당시 “금융위기 과정에서 S&P와 무디스, 피치 등이 일부 국가의 신용등급을 크게 조정하는 바람에 피평가국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며 “신용 리스크를 측정할 때에는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해야 한다”며 3개국 공조의 필요성을 밝혔다.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국가 신용등급을 발표한 곳은 일본이다. 일본 R&I와 JCR은 외환위기 직후부터 자국 기준의 국가 신용등급을 발표하고 있다. 대상국도 50여개국이 넘는다. 일본 기업의 해외진출이 일반화됐고, 외국기업이 엔화표시로 채권(사무라이본드)을 발행해 자금조달을 하려는 수요도 많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처음으로 50개국의 국가 신용등급을 발표한 중국 다공은 여러 논란거리를 제공했다. 다공은 지난해 국가 신용등급을 처음 발표하면서 미국의 신용등급을 ‘AA’라고 발표했다. 이는 중국(AA+)보다 한 단계 낮은 것으로 스위스, 호주 등 12개 국가보다도 낮았다. 미국에 대해 최고등급인 AAA를 부여한 무디스, 피치, S&P 등 글로벌 신평사와는 다른 파격적인 행보였다.


이어 지난해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는 미국의 신용등급을 ‘AA’에서 ‘A+’로 한 단계 더 낮췄다. 해외 언론들은 “일반적인 시장의 위험성을 평가했다기보다는 정치적 게임을 하고 있다”며 비난했다. 하지만 다공도 반박했다. “미 연준의 2차 양적완화로 인해 달러 약세가 계속되고 미국 신용위기가 지속적으로 악화될 것이기 때문에 국가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하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지역 특수성 반영 없는 한계 불만
미국은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였지만 국가 신용등급은 여전히 AAA다. 아무리 달러를 찍어내는 기축통화국이라고 해도 한해 재정적자가 1조 달러가 넘는 나라가 최우수 신용등급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이 많다. 4월 18일 S&P는 미국에 대한 등급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바꿨다. 미국의 신용등급이 AAA자리에서 강등될 수 있음을 시사한 것은 1991년 신용 전망을 시작한 이후 처음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 외환위기 때 국제 신평사들이 우리에게 들이댔던 잣대를 생각해보면 지금 북미와 유럽대륙 국가들에 주는 신용등급은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앵글로색슨족이 만든 공고한 금융질서에 대해 아시아의 불만이 커져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웬만한 경제력을 갖고 있지 않은 한 개별 신평사가 다른 나라의 국가 신용등급을 조사하기는 쉽지 않다. 국가 신용등급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특정국가의 경제상황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상당수 자료는 일반에 공개되지 않은 대외비다. 투자와 자금조달의 매력이 없다면 굳이 경쟁 국가의 신평사에 대외비를 공개할 이유가 없다. 채권시장의 한 관계자는 “우리나라의 신용등급이 오르거나 내리기 직전 외국인들이 국내 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이거나 파는 형태는 빈번히 반복되고 있다”며 “신평사들이 국가 신용등급을 조정하기에 앞서 외국계 투자자들과 정보를 사전에 공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번 한신정평가의 국가 신용등급 발표에서도 우리보다 경제규모가 큰 중국과 일본이 빠진 것은 이 때문이다. 한신정평가는 당초 12개 국가에 대해 국가 신용등급 부여를 타진했다. 참여하겠다며 손을 든 국가는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아시아 4개국과 브라질 등 남미 1개국이었다. 한신정평가는 올해 안에 멕시코와 터키에 대한 신용평가를 마칠 예정이다. 인도, 아르헨티나, 슬로베니아, 페루 등도 조만간 참여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여전히 ‘중량급’ 국가는 보이지 않는다.

국가 신용등급 부여는 글로벌 기준에 따른다. 하지만 신평사들마다 자국과 자국기업의 선호 정도에 따라 평가는 차이가 난다. 자국과의 경제협력 정도, 추후 성장성에 대한 평가 등 비계량적 요소들이 영향을 받을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유럽국가의 경우 우리보다 재무구조가 취약하더라도 EU나 미국을 통해 자금을 차입할 가능성이 높다면 신용등급은 우리보다 높을 수 있다. 부자 아버지를 둔 아이가 가난한 부모님을 둔 집 아이보다 결혼시장에서 고평가를 받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렇다보니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자국에 대한 평가는 후하다는 것이다. 한신정평가가 한국에 부여한 신용등급은 AA다. 여타 신평사들이 매긴 신용등급 중에서는 가장 높다. S&P의 A보다는 3단계, R&I의 A+보다 2단계 높다. 비교적 좋은 신용등급을 준 다공의 AA-보다도 한 단계 높다.

그나마 한국은 나은 편이다. 중국과 일본은 아예 자국의 신용을 최고등급인 AAA로 평가했다. 이를 기준으로 중국 다공은 신용평가를 ‘중국>일본>한국’으로 봤다. 일본 R&I는 ‘일본>중국=한국’으로 봤다.

물론 상대국이 보는 신용등급은 다르다. R&I는 중국에 대해 A+를 줬다. AAA보다 4단계나 낮다. 다공은 일본에 대해 AA를 줬다. AAA보다 두 단계 낮다.
재밌는 것은 S&P가 매긴 한·중·일 국가 신용등급이다. S&P는 중국과 일본에 대해 AA-를 각각 부여했다. 중국과 일본이 스스로에 내린 AAA보다는 3계단 아래다. S&P는 중국과 일본의 신용등급이 같다고 본 것이다. 한국은 이보다 두 단계 낮았다. 종합하자면 ‘중국=일본>한국’이다.

신평사 관계자는 “신평사가 아무리 객관적으로 신용을 평가한다고 해도 자국에 대해서 공정한 잣대를 들이대기 힘든 것은 인지상정”이라며 “다양한 신평사가 자국과 자국기업의 이해관계를 반영한 신용등급을 발표해 시장에서 경쟁시키는 것이 가장 객관적인 방안”이라고 말했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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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서툰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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